◈ AMBER
1) 브와 파린
- 라티잔 파퓨미에르
- Bois Farine by L'Artisan Parfumeur
- 구운 비스킷 내음이 나는 우드
-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
- 브와 파린은 밀가루 나무라는 의미다. 깔끔하게 닦아 오늘의 패스트리를 만들 준비가 된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에 놓인, 향신료를 섞은 반죽에서 나는 아늑하고 사랑스러운 향기가 떠오른다. 브와 파린의 노트 목록이 보도 자료로 세상에 나왔을 때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의심이 들게 했다. 펜넬, 아이리스, 구아이악우드라고? 하지만 그게 향수 의 세계다. 허브, 꽃, 나무를 완벽하게 조향 할 수 있다면, 프랑스 아르티장 베이커리에서 알싸한 향신료가 들어간 비스킷 반죽의 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003년에 출시 되었을 때 브와 파린은 다른 어떤 향수와도 달랐고 여전히 비스킷 내음이 나는 걸작으로 우뚝 서 있다.
2) 레르 드 리앙
- 밀러 해리스
- L'Air de Rien by Miller Harris
- 느릿느릿 조용히 다가오는 유혹
- 조향사 린 해리스
- 아무것도 없는 공기라는 의미의 레르 드 리앙은 배우 제인 버킨을 위해 제인과 함께 만들 었다. 무심한 파리와 런던에서 제인의 시크함을 포착하고, '침묵이 주는 분위기’를 병에 담으려는 목적이었다. 린 해리스가 성공했는지는 개인의 판단에 맡기거나 제인 버킨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향수를 떠올리려 애쓸 때, 모호함만 감도는 보헤미안적인 기억을 포착했다는 점만 느껴진다. 내가 옛날에 그 파티에 갔다가 정말로 그 아파트에서 일어났던 일인가? 레르 드 리앙은 선반 위 책에 쌓인 먼지, 어제 피우고 남은 선향 같은 머스크 인센스, 시프레 노트의 전형적인 프랑스 산 파우더 퍼프 냄새가 난다. 아늑한 앰버 노트는 '부드러운 면 플란넬 베갯잇‘이 가장 적당한 표현이다. 나도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위해 이 향수를 뿌리는 걸 좋아한다.
3) 뮤스크 앙상세
- 아이데스 데 베누스타스
- Musc Encensé by Aedes de Venustas
- 여러 가지가 뒤섞인 뮤스크
- 조향사 랄프 슈비거
- 뮤스크 앙상세는 일부러 애매하게 지은 이름으로 큰 소리로 발음하면 인센스나 광기라는 단어처럼 들릴 수 있다. 소맷자락에 몇 가지 속임수를 감춘 향수라 그 장난스러운 이름이 아주 잘 어울린다. 뮤스크 앙상세는 경건한 교회 인센스 향이 배어 있는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스웨이드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몰려드는 히피스러운 클라리세이지와 깨진 보도블럭 사이 삐죽이 솟은 풀잎의 싱그럽고 짙은 푸릇함을 지울 수 없다. 이 반항아들의 손길은 점잖은 겉치례를 걷어내고 단정하게 단추를 채운 셔츠 아래 숨겨진 관능적인 머스크 노트로 우리를 데려간다. 신사 클럽의 묵직한 내음과 매혹적인 전율의 향기를 모두 가지고 변덕스럽게 장난치는 뮤스크 앙상세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생각을 일깨우고 눈을 반짝거리게 한다.
4) 몰리큘 02
- 이센트릭 몰리큘스
- Molecule 02 by Escentric Molecules
- 매끄러움 중에 매끄러움
- 조향사 게자 쇤
- 몰리큘 02는 단일 분자 화학향료인 암브록산으로 만들었다. 그 자체로도 은은하게 빛나는 향기가 나며, 조향의 발산력을 높이고, 더 오래 지속되게 한다. 자연에서는 앰버그리스에서 추출할 수 있다. 꽤 신비한 향이지만 상대적으로 무척 비싸다. 천연 장미 에센스 오일이나 수선화 앱솔루트만큼 비싸진 않지만, 오렌지 에센셜 오일보다는 열 배 정도 비싸다. 몰리큘 01이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이후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암브록산을 병에 담기로 한 건 좋은 아이디어였다. 비록 많은 조향사가 여러 개의 향수를 겹쳐 뿌려 취향대로 섞는 '레이어링'에 공포를 느끼지만, 몰리큘 02가 정말 좋은 향수인 이유는 레이어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후각용 프라이머처럼 사용해보자.
5) 베이 럼
- 지오 F. 트럼퍼
- Bay Rum by Geo.F. Trumper
- 가장 깔끔하고 개운한 머스크
- 조향사 미공개
- 처음부터 끝까지 희미한 카네이션 내음이 섞인 클로브 노트가 느껴진다. 그리고 빻은 월 계수 잎사귀 향도 마찬가지다. 베이 럼의 스파이스 노트는 강렬하다. 내가 애프터 쉐이브를 쓰는 사람도 아니고 이건 신사를 위한 전통적인 스타일의 콜로뉴라서, 단순한 호기심에 Basenotes.net에 올라온 다른 후기를 살펴봤다. 모두 갖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클로브 애호가들은 베이 럼을 찬양했고, 클로브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질색했다. 게다가 베이 럼은 '콜로뉴'라는 단어에 대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전형적인 생각의 차이로 고통받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향이 강하지 않고 금방 사라지는 스플래시를 의미하지만, 미국에서는 남성용 향수를 뜻하며 몇 시간이고 지속된다. 전통적인 향수 기업 대다수가 베이 럼 같은 향수를 만들고 있고, 그것들은 향이 약하지만 '오, 이거 완전 대박인데?'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 지속력은 머스크가 부드럽고 점잖게 꼭 잡고 있다.
6) 뮤스크 라바줴
-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 Musc Ravageur by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 황홀하게 취하는 머스크
- 조향사 모리스 루셀
- 마스터 조향사에게 브리핑 없이 전권을 주면 어떻게 될까? 프레데릭 말이 딱 그랬다. 단종 되어 많은 사람의 애도를 받은 구찌의 엔비와 전설적인 겔랑의 인솔런스 같은 대중적인 클래식을 선보인 모리스 루셀은 평소처럼 뛰어난 솜씨로 뮤스크 라바줴를 만들었다. 그 결과 찐팬을 가진 컬트 클래식이 탄생했다. 이건 모기약 냄새가 아니라 방금 씻고 나온 연인의 상쾌함 과 선잠을 자고 있던 상대의 체취가 묻은 베개 내음이 섞인 향기가 난다. 라벤더와 시트러스 노트가 오프닝에서 엄청나게 깔끔한 향기를 선사하고, 곧 가까이 누운 연인의 살결에서 느껴지는 체취로 녹아든다. 깨끗함과 잠들기 전 보이는 목 뒷덜미처럼 아주 사적인 체취가 뒤섞여 있는 아주 매력적인 향수다.
* 참고
<애니멀릭 향수>
향수에서 머스크는 원래 동물로부터 얻던 원료를 설명 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인 '애니멀릭’한 원료로 결코 호랑이 굴 같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애니멀릭 노트는 현재 대부분 합성 원료로 만들고 일부는 여전히 동물에게서 얻는다. 밀랍이나 앰버 그리스 분자처럼 부드럽지만 너무 강렬하기도 해서 실수로 과하게 넣으면 쓰레기통 같은 냄새가 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보통 머스크 향기를 악취를 뿜는 동물 냄새를 떠올리는데 사실 부드러운 파우더 향기가 난다.
독특한 동물의 냄새를 풍기는 원료로는 비버가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분비하는 물질로 가죽 냄새가 나는 카스토레움, 비슷하지만 사향고양이한테서 얻는 시벳, 작고 귀여운 바위너구리 무리의 배설물이 오랫동안 응고된 이라세움 등이 있다. 전부 사실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걸 쓸 생각을 했을까? 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인간 이 우연히 비버의 향을 줍고 '오 향수에 넣어 봐야지' 라고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런 애니멀릭 노트는 아주 조금만 넣어도 향수의 잔향성을 높여 준다. 요즘에는 동물성 원료를 대체한 다양한 애니멀릭 합성 원료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