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UITY
1) 마일스
- 데따이으
- Miles by Detaille
- 오픈 탑 스포츠카를 타고 눈부시게 빛나는 청춘들
- 조향사 미공개
- 프랑스의 불사조 같은 브랜드 데따이으가 출시한 프루티, 우디 앰버 계열 향수다. 데따이으는 1905년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오래된 주문서, 장부, 제조법을 원형 그대로 모두 보유하고 있다. 영어식 발음인 '마일스'로 부르는 이 향수는 라벨에 1920년대 스포츠카 스케치가 그려져 있고, 세련된 세로줄 무늬가 새겨진 향수병에 고전적인 소프트 레진 앰버 향을 담았다. 데따이으는 말린 과일과 자두 향을 추구했겠지만, 내게는 꿀을 바른 나무 위에서 맴도는 블랙커런트 새순의 향취가 느껴졌다. 여태껏 맡아본 그 어떤 향수와도 다른 향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데따이으는 마일스가 놓여 있는 남성 향수 진열대에서 나를 여성용 향수 쪽으로 돌려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도 모험심이 강했던 여성들은 이 향수를 뿌렸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안될 게 뭔가?
2) 쁘아종(포이즌)
- 디올
- Poison by Dior
- 1980년대를 휘어잡은 향기
- 조향사 장 기샤르
- 쁘아종을 싫어한다고 선언하는 게 유행이란다. 자자, 진지한 척은 그만하자. 몇몇은 투베로즈 향이 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블랙커런트, 크렘 드 카시스의 향취가 틀림없다. 쁘아종은 나무, 과일, 꽃, 어마어마하게 짙고 풍부한 앰버 노트, 리베나 블랙커런트 주스 내음, 저항할 수 없고 확실한 마법과 같은 모든 향을 품고 있다. 물론 유행으로만 머물기에는 너무 인기가 많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게, 쁘아종은 품격이 있다. 극단으로 치닫던 1980년대 스타일은 쉽게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쁘아종은 고전이다. 이 향수를 뿌리고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사해 보라. 철없던 시절 끝내주거나 몸서리치던 풋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썹을 꿈틀거리는 이모나 삼촌을 지켜볼 준비가 되었는가? 그들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다. "그땐 그랬지."
3) 디오레센스
- 디올
- Dioressence by Dior
- 위협적인 매력과 위상
- 조향사 가이 로버트
- 어울리는 장갑과 모자 없이는 집을 나설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던 파리지앵을 위한 향수다. 젊은 세대가 유니섹스 진과 샌들 차림에 머리를 길게 기르던 1969년에 처음 출시되었다. 그들과 달리 세련된 착장에 디오레센스를 뿌리면서, 파리지앵은 플로럴 시프레 향수에 앰버 베이스를 추가한 가이 로버트의 대담한 시도가 반순응주의의 극치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디올의 클래식 향수 라인과 잘 어우러져, 옥스퍼드 가 셀프리지 백화점의 키가 큰 영업사원은 내게 디올의 조향사 가이 로버트와 에드몽 루드니츠카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디오레센스는 무슈 디올의 개인적인 창조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맞았다. 리뉴얼을 거친 지금도 디오레센스는 그 담대한 향취로 크리스챤 디올 특유의 스타일을 널리 퍼트리고 있다. 플로럴, 이끼 혹은 앰버 계열로 분류되기도 하는 디오레센스는 눈부시게 빛나는 알데하이드 탑 노트에 이끼, 발삼, 스파이스와 과일향을 더해 온갖 종류의 꽃향기를 머금고 있다. 20세기 중반 레트로의 절정이다.
4) 라 쁘띠 로브 느와르 EDP
- 겔랑
- La Petite Robe Noire EDP by Guerlain
- 나풀거리는 미니 블랙 드레스
- 조향사 티에리 바세
- 라 쁘띠 로브 느와르는 장난기 가득한 프루티 계열의 겔랑 향수 시리즈 출현을 처음 알린 향수다. 뢰르 블루와 미츠코 같이 존경받는 대선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더 어린 고객을 찾기 위한 시도였을 것이다. 라 쁘띠 로브 느와르 오 드 퍼퓸은 오 드 투알레트와는 다르게 희미한 아몬드향을 품은 체리 노트의 향연이 펼쳐진다. 여기까지 보면 아마도 머릿속에 체리 베이크웰이 떠오르겠지만, 순수한 바닐라 향도 미세하게 풍기며 여러 가지 다양한 향내를 뿜어낸다. 식용 원료의 향취 속에 숨겨진 아이리스, 작약, 장미로 만들어진 부케에서는 억누르기 힘든 플로럴 향이 노래처럼 흘러나와 새콤한 체리의 시작 향과 잘 어우러진다. 거기에 마치 드레스에 맞춘 검은 속눈썹처럼 매혹적인 향이 번져나가는 약간의 리코리스와 함께 파촐리가 향취의 균형을 잡아준다. 경고: 밤새 춤을 추게 될 수 있음.
5) 라 쁘띠 로브 느와르 블랙 퍼펙토 오드퍼퓸 플로럴
- 겔랑
- La Petite Robe Noire Black Perfecto Eau de Parfum Florale by Guerlain
- 붉은 장미와 칵테일
- 조향사 티에리 바세
- 만약 당신이 진 앤 오렌지 칵테일에 올려진 마라스키노 체리가 유럽의 운치를 선사하는 시대에 자랐다면, 블랙 퍼펙토의 장미, 어둡고 씁쓸한 아몬드, 달콤한 체리향에 웃음을 지으며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두 언어로 표현한 검정(느와르, 블랙)을 포함해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이 향수는 겔랑이 출시한 18개의 쁘띠 로브 느와르 시리즈 중 하나다. 블랙 퍼펙토가 우연찮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가 된 건 아마 블랙 미니 드레스를 간절히 바라고, 부모님의 술 진열장을 몰래 열어 술이 아닌 펜윅 식료품점에서 사 온 이탈리아산 체리 절임 단지를 꺼내던 사춘기가 떠올라서일 것이다. 윤이 나고 매끄러운 장미 향은 달콤하면서도 다행히 무겁고 어두운 향취가 어우러져 있다. 마치 장미 시럽, 아마레토, 쓴맛이 나는 비터즈를 섞고, 마라스키노 체리를 칵테일 픽에 꽂아 올린 샴페인 칵테일 같은 향수다.
6) 르 빠티시쁘 빠세
- 세르주 루텐
- Le Participe Passé by Serge Lutens
- 겨울 과일의 기억
- 조향사 크리스토퍼 쉘드레이크
- 문법 용어를 따서 향수 이름을 짓는 건 아마 세르주 루텐 밖에 없을 것이다. 세르주 루텐의 모든 향수는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데, 이는 모두와 사랑에 빠지는 건 아니지만 경의 정도는 표현하게 되는 것과 같다. 르 빠티시쁘 빠세는 세르주 루텐의 많은 향수와 마찬가지로 앰버 계열이다. 중동의 발삼 노트에서 느껴지는 끈적끈적한 말린 과일과 아랍 수크에서 찾은 고급진 대추야자의 포장을 풀고 거기에 살구, 퀸스, 자두 페이스트를 가득 채웠다. 과일을 제철에만 먹을 수 있던 시절, 신선한 라즈베리의 향기를 그리워하면서 집에서 만든 잼으로 추운 몇 달을 견뎌내던 기억이다.
* 참고
<프루티 앰버> 프루티 앰버는 존재하는 향 중에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아주 기분 좋은 향기지만, 아마도 전 세계 향수 사용자 절반 정도는 전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프루티 앰버 향은 짙고 달뜬 화려한 향취로 활기 넘치는 이모가 샴페인 칵테일을 몇 잔 들이켜고 사람들을 덥석덥석 안아대며 마음을 나누듯이 당신의 공간에 치고 들어온다. 쁘아종은 프루티 앰버 계열 향수의 챔피언이다. 시끌벅적하지만 사랑스럽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 코웃음을 치겠지만, 프루티 앰버 향수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즐겁게 방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 참고
<마지팬 분자> 다크 체리와 아몬드 향기가 나는 마지팬 노트는 종종 깊은 프루티 앰버와 향이 비슷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과일도 해치지 않는다. 비터 아몬드 에센셜 오일은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주변의 모든 향을 압도하는 효과가 있으며, 인상적인 만큼 추출 비용도 많이 든다. 천연 벤즈알데히드 분자로 형성된 향이기 때문에, 보통 다크 체리와 아몬드 향 합성원료를 사용해 구현한다. 바닐라 향을 바닐린 분자로, 통카의 향을 쿠마린 분자로 재현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