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LORAL
11) 풀-나나
- 그로스미스
- Phul-Nana by Grossmith
- 빅토리아 시대의 관능미
- 조향사 로베르트의 향수 하우스
- 20세기 중반 자취를 감추었던 그로스미스의 향수가 다시 돌아오자, 사람들은 큰 집과 신탁 저축을 가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고모할머니를 다시 찾은 것처럼 매우 기뻐하며 환영했다. 고모할머니는 아마 이걸 뿌리셨을 것이다. 풀-나나는 풍부하고 아찔한 꽃향기가 가득한 앰버 향수로, 부유한 사람들이 파촐리 향이 나는 파시미나 숄을 걸치고, 인디고 염료로 만든 파촐리 향의 인도산 잉크로 편지를 쓰던 1891년, 힌디어 이름과 함께 출시되었다. 발삼, 플로럴, 밝은 시트러스 탑 노트에 이어 파촐리 노트가 중심을 잡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그로스미스는 유명했고, 화려하며 고급스러웠다. 그 증손녀인 지금의 그로스미스는 조금 인기는 덜하지만 변함없이 매력적이다.
12) 아프레 롱데
- 겔랑
- Après L'Ondée by Guerlain
- 부드럽고 여리여리한 아름다움
- 조향사 자크 겔랑
- 1906년에 출시된 아프레 롱데는 겨울에 세차게 쏟아지는 비가 아닌 가볍게 내리는 봄의 소나기를 의미하는 '비가 온 후'로 번역할 수 있다. 부드러운 꽃봉오리로 살살 간지럽히는 그 계절이다. 촉촉한 바이올렛과 잔잔한 헬리오트로프는 이끼가 낀 천사 조각상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처럼, 마음을 어지럽히는 멜랑콜리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풍부한 아이리스 노트가 작디작은 오렌지 꽃과 미모사의 노란 봉오리를 만난다. 겉으로는 들뜬 봄의 꽃다발을 담고 있지만, 아프레 롱데에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 그 고요함은 항상 파리의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의 아름다움과 침묵을 생각나게 한다. 대리석 조각된 세라프 천사들의 석고상, 그리고 그 발치에 놓인 이끼와 꽃.
13) 오피움
- 입생로랑
- Opium by Yves Saint Laurent
- 신비로운 향신료의 세계
- 조향사 장 아믹, 장 루이 시우작
- 많은 오피움 애호가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래된 1977년의 오리지널 제조법에 대해 여전히 애도하고 있다. 분이 폴폴 날리는 예전의 파우더리 한 느낌은 없지만, 2009년 출시 버전의 오피움은 여전히 아름답고 풍부한 스파이시 앰버로 매력적이다. 프랑킨센스, 미르, 황금처럼 따뜻한 앰버 노트가 포근하게 감싸는 플로럴 부케이며, 파촐리 노트는 교회에서 풍겨오는 연기 같은 레진 노트에 강렬함을 더한다. 시트러스 노트가 향신료 사이사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며 향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하고, 크렘 브륄레 윗부분처럼 황금빛 갈색으로 물든 바닐라 노트가 향긋하게 마무리한다. 노릇노릇하고 편안한 아주 아주 프랑스다운 향기가 난다.
14) 선
- 질샌더
- Sun by Jil Sander
- 따사로운 광채
- 조향사 피에르 부르동
- 선로션을 닮은 병을 보면 SPF가 없는데도 왠지 해변에 꼭 가져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영국인이라서 선크림 하면 코코넛 향기를 떠올리지만, 선은 시크한 유럽 본토 사람이라 오렌지 꽃 향기가 난다. 은방울꽃과 장미의 아름다운 플로럴 노트가 사방에 흐드러지게 퍼진다. 카네이션의 알싸한 꽃향기가 따스한 앰버 베이스로 녹아들어 가고, 포근한 황금빛 바닐라 노트는 아이스크림까지 가지 않아도 코를 부비적댈 만큼 기분 좋은 향긋함을 더한다. 발아래 뜨거운 모래와 햇빛의 열기를 머금고 피부를 사로잡는 향이지만, 뿌리고 칵테일을 마시러 바닷가 바에 가도 좋을 만큼 충분한 활기차고 화려하다.
15) 꾸뛰르 꾸뛰르
- 쥬시 꾸뛰르
- Couture Couture by Juicy Couture
- 과즙이 팡팡 터지는 앰버
- 조향사 오노린 블랑
- 쥬시 꾸뛰르의 향수는 대부분 과즙이 풍부한 향이 나기 때문에 갓 짜낸 과일이 취향이라면, 분명 어울리는 향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벨벳처럼 보드라운 앰버 베이스를 가진 현대적인 프루티 플로럴 노트에 대해서는 화려한 로고가 박힌 벨벳 소재의 운동복 하의만큼이나 의견이 갈리는데, 아마 꾸뛰르 꾸뛰르는 핑크 그레이프라고 표현한 두드러지게 밝은 탑 노트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추수철에 느껴지는 부드럽게 으깬 과일, 꽃, 우드 노트와 할리우드의 고급 브랜드 아이스크림의 향기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듯하다. 한껏 멋을 내고 다 큰 언니들과 놀러 나갈 때 도움이 되는 달달하면서도 우아한 꾸뛰르 꾸뛰르는 기분 좋을 때 뿌리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
16) 세빌 아 로브
- 라티잔 파퓨미에르
- Séville à l'Aube by L'Artisan Parfumeur
- 새벽의 오렌지 나무 아래
- 조향사 베르트랑 뒤쇼푸르
- 망설임 없이 곧바로 이걸 사서 뿌린 다음, 오렌지 나무 아래 누워 세비야의 하늘에 밝아오는 새벽을 바라보는 연인이라는 세련된 설명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아니면 풍경화 같은 경치가 펼쳐진 길을 데니스 볼리외가 어떻게 베르트랑 뒤쇼푸르와 협력해 라티잔 파퓨미에르의 세빌 아 로브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다소 사적인 자전적 설명을 읽으며 한참 걸을 수도 있다. The Perfume Lover(향수 애호가)에서 사실 퍼퓨머리와 데니스에 대한 더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향기에 대해 말해보자. 페티그레인은 시트러스 열매를 수확한 후 남은 씨앗, 잎사귀, 잔가지 등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로, 오렌지와 레몬 향이 나며 올리브 나무 냄새도 감돈다. 여기에 풍부하고 레진향이 풍기는 인센스 노트를 더하면 종이 울리는 교회의 문을 열고 봉헌대로 향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