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UITY
8) 로스트 인 더 시티
- 밀러 해리스
- LOST in the City by Miller Harris
- 런던에 숨겨진 여름 정원
- 조향사 매튜 나르딘
- 로스트 인 더 시티는 밀러 해리스 컬렉션의 일부로 걸어서만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런던의 보이지 않는 지역에서 영감을 받았다. 유리로 반짝이는 현대적이고 화려한 건물 아래에 런던은, 하루를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작은 정원으로 지어진 놀랍도록 푸른 도시다.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안다면 로스트 인 더 시티는, 푸르게 우거진 텃밭과 거기서 나는 싱싱한 채소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이 바로 루바브 향이다. 페어와 딸기가 아기를 낳았다고 상상해 보자. 그 아기가 루바브다. 이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국 요리 재료 세 가지를 말해보자. 얼그레이 차, 잼, 제라늄? 모두 합치면 자꾸만 더 뿌리고 싶은 너무나 영국 스러운 오 드 퍼퓸이 탄생한다. 장미는 타르트 잼을 만들기에 적당한 달콤함만 지닌 쌉싸름한 블랙커런트 노트를 만난다. 얼그레이는 얼그레이답게 활력을 불어넣고, 가장자리를 둘러싼 플로럴 노트는 정원의 모든 것을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로스트 인 더 시티는 울타리 너머 언뜻언뜻 보이는 이 모든 것이다. 여기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만 더하면 된다.
9) 플리츠 플리즈
- 이세이 미야케
- Pleats Please by Issey Miyake
- 주저하며 만든 라즈베리
- 조향사 오헬리엉 기샤르
- 로디세이가 향수의 세계를 바꾼 지 20년이 지난 2013년 다른 비슷한 향수와 잘 어울리는 플리츠 플리즈가 등장했다. 공식적인 프루트 노트는 아시아 배라고 부르는 나시 배로, 갓 자른 신선한 그린 프루티 노트의 오프닝을 선사한다. 꽃이라고 이름 붙인 작약과 스위트피 노트로 우리는 마스터 조향사가 자연을 본떠 창조한 상상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천연 파촐리 역시 환상을 자아내며, 이러한 플로럴 프루티 향기의 조합은 라즈베리라고 믿을 만한 노트를 만들어낸다. 플리츠 플리즈는 2009년 어 센트가 시장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후 출시되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세이 미야케는 자신의 브랜드를 위한 향수를 원하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최대한 향이 적게 나서 물에 가까운 향수를 출시하는 데 동의했다. 굉장히 불성실한 이름의 '어 센트'는 심지어 물보다도 향이 덜했고 곧 단종되었다. 미야케가 거침없고 멋진 옷을 계속 만들고 싶다면, 아름답지만 좀 더 유행할 만한 향수를 출시할 때라고 조용히 알려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향수가 있다. 바로 플리츠 플리즈다.
10) 쉐이드센츠 루비 우
- 맥
- Shadescents: Ruby Woo by M.A.C
- 일부러 감추어둔 체리 주스
- 조향사 로베르테
- 맥의 루비 우는 폴란드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는 검붉은 체리 주스 같은 향이 난다. 달콤함과 톡 쏘는 향의 균형이 선사하는 풍미가 너무 강렬해서 한 모금씩 홀짝거릴 수밖에 없다. 너무 맛있어서 아무한테도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건 루비 우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맥 매장에서만 살 수 있거나, 백화점에서는 서랍 속에 넣어둔 걸 꺼낼 수 있는지 물어봐야 찾을 수 있다. 루비 우는 같은 이름의 립스틱과 어울리는 향수다. 네모난 병은 스타일, 모양, 시향지, 향기의 정점을 보여준다. 알싸한 체리 노트, 풍성한 아이리스 향이 담긴 장미노트와 함께 붉은 가죽으로 만든 탭슈즈가 나무 계단을 따라 춤추며 내려가고 있다. 이 좋은 걸 왜 숨겨놓는지! 어두운 구석에서 꺼내 밝은 조명 아래 둘지어다.
11) 바이올렛 인 러브
- 퍼퓸 드 니콜라이
- Violette in Love by Parfums de Nicolai
- 향수 애호가의 프루티 플로럴
- 조향사 패트리샤 드 니콜라이
- 바이올렛 인 러브는 오 드 투알레트로 그 사랑스러운 향기를 유지하고 싶다면 자주 뿌려야 한다. 패트리샤 드 니콜라이가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공장에서 만들고 자신의 퍼퓨머리와 소수의 전문 퍼퓨머리에서만 판매한다. 니콜라이의 향수는 이미지 컨설턴트와 광고 경영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담백한 병이 전통적인 왁스 봉인이 있는 깔끔한 포장 상자에 담겨 있다. 고전적으로 훈련받아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조향사의 손길과 함께 바이올렛 인 러브는 알싸한 블랙커런트, 부드럽고 매끈한 머스크 노트가 감싸는 장미와 아이리스 향기를 선사한다. 니콜라이 향수는 정도를 고수하는 패트리샤 덕분에 타협 불가능한 품질을 보여준다. 바이올렛을 찾아 사랑에 빠져보자.
12) 마드모아젤 로샤스 꾸뛰르
- 로샤스
- Mademoiselle Rochas Couture Rochas
- 프렌치 드레스를 입은 베이크웰 타르트
- 조향사 안 플리포
- 로샤스는 향수 업계에서 최초로 뭔가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개 중간에 진입해서 다른 향수를 뛰어넘고 앞서간다. 마드모아젤 로샤스 꾸뛰르에는 설탕 가루를 가볍게 뿌린 매끈한 체리 아몬드 통카 플로럴 우드 노트가 있다. 들이마시면 살이 찔 것 같은 달콤함은 아니다. 이건 솜사탕이 아니라 약간 어두운 자홍색 푸크시아 꽃이다. 베이크웰 타르트 향과 매우 흡사해서 더비셔 마을은 이 향수를 그들의 시그니처 향으로 삼아야 한다. 오리지널의 저녁 버전으로 마드모아젤 로샤스에 장미-사과 노트와 블랙커런트 - 크럼블 노트가 더해졌다. 프루티 프로럴 계열 향수를 좋아한다면 둘 다 사보는 게 어떨까? 가격도 나쁘지 않고 뿌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13) 아모라
- 헨들리 퍼퓸
- Amora by Hendley Perfumes
- 과수원을 어슬렁거리는 맹수
- 조향사 한스 헨들리
- 모든 조향사가 그라스에서 훈련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고귀한 혈통 출신이 아니더라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주위를 살펴보면 일본에는 인센스 조향사, 중동에는 아타르 조향사가 있으며, 아모라의 경우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독특한 향수로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모험적인 미국 조향사가 있다. 프루티 플로럴 계열이지만 달콤한 자둣빛 여름 과일과 장미 울타리 주위로 짙푸른 담뱃잎과 킁킁거리며 나무 둥치를 어슬렁거리는 호랑이가 있다. 헨들리 퍼퓸 향수는 미국이나 폴란드에서만 살 수 있지만, 보물은 쫓아가 구할 가치가 있다.
14) 딜런블루 뿌르팜므
- 베르사체
- Dylan Blue Pour Femme by Versace
- 화려하고 현란한 베르사체 패션 그 자체
- 조향사 칼리스 베이커
- 베르사체를 이끄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섬세함과 절제미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소개할 향수는 생동감 넘치는 브랜드와 잘 어울린다. 화려한 금색 실크 셔츠에 이 향수를 스무 번쯤 뿌려서 입체적이고 화려한 베르사체 그 자체가 되어보자 패턴과 무늬로 눈을 가리고 향기로 쓰러뜨리는 거지. 이름에 '블루'가 붙는 향수는 보통 가벼운 바다향 스플래시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딜런블루는 다르다. 가득 쌓인 형형색색의 과일을 으깨고 증류해서 만든 부드럽고 끈끈한 칵테일로 오페라 디바의 첫 공연날 드레스룸에서 볼 수 있는 꽃다발보다 더 많은 플로럴 부케 어코드가 들어 있다. 디자이너 향수가 판에 박힌 듯 재미없고 색조가 약하다는 조소를 받던 시대였다. 도나텔라는 여러 시제품 중에 가장 강렬하고 화려한 걸 골랐다. 유행을 꼭 따를 필요는 없잖아?
* 참고
<프루티 플로럴 향조의 화학> 여러분이 조향사가 갓 딴 딸기를 발로 밟아 뭉갠 다음 곧바로 천연원료로 바꾸어놓는다는 걸 믿는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아주 최근까지 시트러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과일 향료는 합성원료로 만들었다. 천연 블랙커런트 앱솔루트인 부흐종 드 카시가 있긴 하지만, 이건 블랙커런트 열매가 아닌 꽃봉오리에서 추출한 것이다. 체리 향은 보통 강렬한 아몬드 마지팬 노트에 부드럽고 달콤하게 만드는 화학향료를 혼합해서 만든다. 21세기 방식은 재배자가 복숭아, 코코넛 바나나 사과를 포함한 말린 과일에서 향을 추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양한 향을 기대해도 되지만 단단히 값을 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