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MBER
6) 타임리스
- 에이본
- Timeless by Avon
- 스타일리시하고 우아한, 그리고 살짝 도도한
- 조향사 미공개
- 에이본의 타임리스는 1974년 출시되었다가 2012년 단종되었는데, 실망한 팬들의 좌절과 불만으로 가득한 아우성이 귀가 먹먹할 만큼 몰려들면서, 에이본은 그 결정을 빠르게 번복했다. 부드러운 향신료 내음을 밀어 올리는 포근한 앰버 노트와 은은하게 남아 맴도는 모스 베이스 노트로, 타임리스는 요즘 인기인 달달한 향기보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오리엔탈 시프레에 가깝다. 복숭아 향이 나는 보슬보슬한 탈크와 함께 희미한 가죽 냄새도 느껴진다. 온통 꽃으로 뒤덮인 뗏목이 화장대에 놔두고 싶은 재스민, 장미, 아이리스, 가드니아 향기와 함께 기품 있게 나아간다. 미르, 머스크, 수줍은 바닐라 노트의 이국적인 조합에 파촐리가 깊고 진한 흙내음을 물씬 풍기며 닻을 내린다.
7) 올드 스파이스
- 프록터 & 갬블
- Old Spice by Proctor & Gamble
- 놀랍고도 놀라운 플로럴 앰버
- 조향사 알프레드 하우크
- 올드 스파이스는 향수 세계의 다크호스다. 1938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 놀랍고, 어마어마하게 들어 있는 플로럴 노트 또한 놀랍다. 사실, 남성용인 올드 스파이스를 여성들이 뿌리기 시작하면, 새롭고 상쾌한 스파이시 앰버 향수라며 아낌없는 찬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시트러스 노트로 시작해 곧 카네이션, 알싸한 향신료가 더해진 제라늄, 은빛 캡시쿰 노트가 터져 나오고, 그 뒤로 재스민 노트가 살랑이는 바람결처럼 불어온다. 스파이시 노트는 곧 새하얀 솜털같이 가벼운 비누 내음에 녹아들고, 포근한 머스크와 레진 노트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1970년대 TV 광고에 나오는 털이 수북한 서퍼를 떠올리는 건강한 솔트 노트가 마무리를 짓는다. 올드 스파이스처럼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는 클래식 향수는 다 이유가 있다. 남자들만 뿌리게 두지 말자.
8) 시나바
- 에스티 로더
- Cinnabar by Estée Lauder
- 후끈하고 이국적인 앰버
- 조향사 베르나르 송
- 이국적인 매력을 뽐내는 경쟁자인 입생로랑의 오피움이 먼저 출시되었고, 시나바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 향수 애호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풍기던 시나바 향기가 기억난다. 오래된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며 멈추어 서는 곳마다 진귀한 원료를 하나씩 더해 짙은 황금빛 주스를 만드는 것처럼 시나바는 평범한 하루에 신비스러움을 선사한다. 시나몬, 페퍼, 인센스, 레진이 맵싸한 숨결을 내뿜고 나면, 농밀하고 복잡하게 뒤섞인 플로럴 노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스파이스 노트가 꽃향기를 다시 불러내 화려한 카네이션 꽃봉오리가 살짝 엿보이고, 곧 이국적인 잔향이 모든 것을 감싸며 마무리를 짓는다. 매혹적이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세련미가 느껴진다.
9) 해빗 루즈
- 겔랑
- Habit Rouge by Guerlain
- 귀족적인 앰버
- 조향사 장 폴 겔랑
- 해빗 루즈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남자들이 입는 붉은색 재킷에서 이름을 따왔다. 겔랑 가문은 프랑스 기득권층이었고, 장 폴 겔랑은 자신의 마구간을 소유한 기수이기도 했다. 누군가 승마의 향기를 구현해 낸다면 그건 바로 장 폴 겔랑이었다. 해빗 루즈는 클래식 향수지만, 21세기에 걸맞은 업데이트를 거쳐 이제 더 이상 해빗 루즈를 입는 사람들만 살 수 있는 희귀하고 값비싼 향수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쓰는 세제 가루가 아닌 진짜 비누의 얇은 조각으로 깨끗하게 문지른 가죽 냄새가 난다. 가죽 냄새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응접실에 놓인 우아한 꽃장식이 둘러싼 디저트 와인 같은 앰버 노트에 부드럽게 녹아든다. 오리지널 버전과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귀족적인 특권이 느껴지는 향기는 여전하다.
10) 톨루
- 오르몽드 제인
- Tolu by Ormonde Jayne
- 산뜻한 레진
- 조향사 게자 쇤
- 톨루는 수천 년 동안 사용되었지만 찾기가 상당히 어려운 원료 중 하나이며, 향수에서는 다른 노트와 섞여 있어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달콤함 조금에 약재 냄새를 약간 더하고, 인센스 향을 입힌 마법의 물약 같은 냄새가 난다. 오르몽드 제인의 톨루는 게자 쇤이 창립자인 린다 필킹턴과 함께 만든 것으로 약간 산만해 보이는 형형색색의 반짝이는 금은보화를 두르고, 가운데에 톨루 보석을 박아 넣은 화려한 향기의 왕관처럼 느껴진다. 뛰어난 앰버 노트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풍부하고 부드럽다. 거기에 세심하게 어우러진 약간의 주니퍼와 클라리세이지로 그린 허브 노트는 뜻밖의 싱그러움을 선사한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톨루의 향기는 종일 거슬림 없이 곁을 지키며 감돌고 있다.
11) 정글 엘리펀트
- 겐조
- Jungle L'Éléphant by Kenzo
- 부드러운 아기 코끼리
- 조향사 도미니크 로피용
- 향을 맡기 전에 먼저 조엘 데그립이 디자인한 포장 상자와 향수병에 찬사를 보낸다. 언박싱이 의미를 갖기 훨씬 전, 심지어 유튜브가 나오기도 전에 조엘은 그 현대적인 의식의 시초가 될 경험을 창조했다. 상자를 열고 향수를 꺼낼 때마다 나는 그걸 반복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다시 정리해 둔다. 조향사 도미니크 로피용은 지방시의 아마리지, 뮈글러의 에일리언, 랑콤의 라비에벨을 만든 이력이 있다. 그런 로피용의 작품이라는 걸 고려하면 정글 엘리펀트는 꽤나 부드럽다. 가벼운 발걸음의 유순한 앰버 노트는 마치 아기 코끼리가 먹을 게 있는지 코로 팔 위를 스치듯 간지럽히는 기분이 든다. 키가 큰 초록빛 잎과 열대 과일에 내리쬐는 밝은 햇빛이 비누 내음을 머금은 머스크와 바닐라가 더해진 깨끗한 순백색의 꽃향기를 선사한다.
12) 아이콘
- 러쉬 고릴라 퍼퓸 컬렉션
- Icon by Gorilla Perfume for Lush
- 가까이하면 위험한 광기 어린 망나니
- 조향사 마크 콘스탄틴
- 이건 바이런 경에 대한 묘사이지, 러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아이콘의 오리지널 버전이 출시된 1990년대, 러쉬의 아주 초창기 시절 나는 러쉬의 카피라이터였다. 내게 아이콘은 바이런, 아편, 기이한 행동, 아름다운 시로 대변되는 19세기 초, 스캔들이 가득했던 낭만주의를 상징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마크 콘스탄틴은 레드 제플린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아이콘을 만들었다. 하긴 지미 페이지와 바이런은 닮은 점이 많다. 아이콘은 벨벳을 씌운 긴 의자에 한가로이 누워 있는 시인과, 촛불에 반짝이는 금색 잎사귀 문양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가문의 초상화와 함께 장대하게 퇴락하고 있는 베네치아 궁전의 냄새가 난다. 오렌지꽃 탑 노트가 희미하게 일렁이고, 시트러스 미들 노트가 잠시 기운을 불어넣다가, 아이콘은 이내 짙고 어두운 앰버 베이스의 잠에 빠져 그곳에 머문다.
13) 라다넘 18
- 르 라보
- Labdanum 18 by Le Labo
- 록 로즈와 친구들
- 조향사 모리스 루셀
- '실험실'이라는 뜻의 르 라보는, 주로 들어가는 원료명에 4~49 사이의 성분 수를 더해 향수 이름을 붙인다. 실험실 소속 전문가들은 주문과 동시에 블렌딩을 진행하는데, 이는 향취가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특별한 느낌을 선사한다. 라브다넘은 향수 원료 중 하나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록 로즈의 끈적거리는 잎사귀에서 추출한 것으로 아편 팅크인 브랜드 음료 라우다눔과 무관하다. 내게 모리스 루셀은 프레데릭 말의 무스크 라바줴처럼 두려울 정도로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 한 거의 실수가 없는 조향사다. 라다넘 18에서 모리스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싱그럽고 / 달콤하고 / 풍부하며 씁쓸한 라브다넘 노트를, 부드러운 바닐라, 가볍고 보송한 머스크, 통카, 파촐리로 은은하게 만들었다. 애니멀릭 시벳과 카스토레움 노트에 대해 말하자면, 그냥 뚜껑만 열고 흔들어 피어오르는 냄새 정도만 향수에 넣었다. 라다넘 18은 아기 고양이지, 호랑이가 아니다.
* 참고
<발삼과 레진> 값비싼 앰버 향수에서는 보통 수천 년간 치료제와 향수 제조에 사용한 발삼과 레진(수지)을 발견할 수 있다. 발삼과 레진은 스티랙스, 라브다넘, 벤조인, 톨루, 시스투스 그리고 멋진 이름의 오포파낙스 수지를 포함한다. 라브다넘과 시스투스 앱솔루트는 록 로즈에서 추출하는데 라브다넘은 가지의 수액에서 시스터스는 잎사귀와 어린 잔가지에서 채취한다. 조향 클래스를 신청하거나, 5ml 정도 들어 있는 병을 사서 라브다넘과 시스투스 앱솔루트처럼 훌륭한 원료를 직접 맡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