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향기나는이야기

향수 종류(시트러스 – 자몽)

by 향기나는토끼 2023. 7. 18.

◈ GRAPEFRUIT

1) 핑크페퍼 앤 그레이프프루트

- 4711 아쿠아콜로니아
- Pink Pepper & Grapefruit by 4711 Acqua Colonia
- 알싸한 허브를 얹은 자몽 샐러드
- 조향사 세실 후아
- 4711 아쿠아 콜로니아의 시트러스 계열 향수가 잊을 만하면 불쑥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사실 훨씬 더 많지만, 구하기 어려울 한정판 향수까지 다루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아 자제한다. 핑크 페퍼 앤 그레이프프루트도 역시 가성비가 뛰어나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뿌려도 여전히 다른 병을 살 수 있는 돈이 남아 있다. 으깬 핑크 페퍼콘 노트가 먼저 달려들고, 블랙커런트 새순의 알싸한 향과 함께 상큼한 핑크 자몽 노트가 뒤를 잇는다. 티셔츠에 뿌리면 향이 더 오래 남아 좋고, 더운 여름밤 베개에 뿌려도 좋다.

2) 팜플륀느

- 겔랑 아쿠아 알레고리아
- Pamplelune by Guerlain Aqua Allegoria
- 자몽의 위대한 선지자
- 조향사 마틸드 로랑
- 팜플륀느는 상큼한 베르가못, 네롤리, 블랙커런트 노트와 함께 지나칠 정도로 강렬하고 진한 자몽의 톡 쏘는 과즙향을 선사한다. 쌉싸름한 향기는 파촐리 노트로 더 풍부해지고 바닐라 노트로 더 부드러워진다. 풍미 면에서는 감히 비할 향수가 없다. 조말론이 콜로뉴라는 단순한 이름을 가진 첫 브랜드를 에스티 로더에 매각했던 1999년, 겔랑은 아쿠아 알레고리아 컬렉션을 출시했다. 장미, 라벤더, 일랑일랑, 허브 (지금은 모두 단종상태) 가성비가 좋은 오 드 투알레트 라인업이었고, 특히 팜플륀느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겔랑이 새롭게 자금을 지원받은 브랜드와 경쟁하기 위해 특별히 출시하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타이밍이 좋았다. 그때부터 겔랑은 아름답고 때로는 독특한 콜로뉴 컬렉션을 쏟아냈다. 팜플륀느는 그 특출 난 오묘함으로 2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향수가 마음에 든다면 넉넉히 사두도록 하자. 이런 콜로뉴는 갑작스럽게 단종을 선언하는 경향이 있고 특히 팜플륀느가 자취를 감춘다면 그야말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3) 포멜로

- 조러브스
- Pomelo by Jo Loves
- 시트러스가 스웨이드를 만났을 때
- 조향사 크리스토프 레이노
- 조러브스의 조는 대영제국훈장 5등급을 받은 조향사 조말론으로, 조말론 런던을 론칭했다. 향기의 부름은 조를 공백기 이후에 다시 업계로 끌어들일 만큼 강했고, 그 결과 조러브스가 탄생했다. 포멜로는 커다랗고 쌉싸름하지 않은 자몽으로 조러브스의 첫 향수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넘치는 활력이 살아 숨 쉬는 오프닝은 이 향수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가볍고 상쾌한 향에서 벨벳처럼 진하고 묵직한 향까지 시트러스 노트는 고급스럽게 포개진 스웨이드 위로 솜씨 좋게 천천히 내려앉는다. 중간 어딘가쯤 붉은 장미와 미세한 클로브 노트가 어우러진 향이 느껴지지만, 포멜로 노트는 스웨이드가 마련해 둔 부드러운 깃털이불 덕분에 마치 황혼이 지는 잔디밭에 동그마니 떠 있는 노란 풍선처럼 무탈하게 내려앉는다.

4) 오 드 팜플무스 로즈

- 에르메스
- Eau de Pamplemousse Rose by Hermès
- 달콤하고 가벼운 자몽
- 조향사 장클로드 엘레나
- 에르메스는 경이로운 오 도랑쥬 베르트를 출시하고 30년 후 이번에는 핑크 그레이프프루트를 내세운 굉장한 시트러스 향수를 선보였다. 기존의 스위트오렌지, 레몬, 만다린 향수와 함께 최근 높아진 대중의 지속력에 대한 요구를 만족시킨 오도랑쥬 베르트와, 오 드 팜플무스 로즈의 꽁트레 버전까지 에르메스의 모든 시트러스 가족이 한데 모였다. 하지만 나는 단언컨대 시트러스답게 금방 날아가는 오리지널 버전이 더 좋다. 플로리스가 출시했던 핑크 그레이프프루트는 신선한 과일을 반으로 잘랐을 때 느껴지는 바로 그 향이 난다. 지금은 단종되었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돈을 조금 더 들여 에르메스의 팜플무스 로즈를 넉넉히 뿌리는 수밖에 없다. 향수에서 프랑스어로 로즈는 장미꽃 노트 말고도 핑크빛 색조를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팜플무스 로즈를 뿌리며 장미와 자몽 노트의 블렌딩을 기대하기도 하는데, 헛된 기대로 헷갈리지 말도록.

* 참고

<더 강력한 자몽> 자몽 에센셜 오일은 화이트와 핑크 모두 조향 원료로 쓰이지만 향수를 완성하고 나면 보통 오렌지 향에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조향사는 대개 자몽의 상큼하고 쌉싸름한 향기를 확실히 구현하려고 화학향료인 메틸팜플무스를 첨가해 강렬함을 더한다(팜플무스는 프랑스어로 자몽을 의미한다).


loading